역사로 보는 세상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요약 9편(대혼란) 본문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타밈 안사리 저
이 책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요약한 내용입니다.
9. 대혼란
서방의 공격
- 서쪽의 변화 : 기술의 혁신
1. 묵직한 쟁기 사용: 더 깊게 고랑 팔 수 있었음, 개간지 확대
2. 말의 가슴걸이 개발 : 황소 대신 말 사용 가능(말이 황소보다 50퍼센트 빨리 밭을 갈 수 있음)
3. 삼포작 방식의 도입 : 잉여 생산물 교환 → 시장 활발
부유해진 유럽들 성지 순례하게 됨
→ 이때 그리스도교 순례자들 성지에서 튀르크족에게 모욕당하고 돌아옴
+ 동방의 풍요로움
+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셀주크투르크 비잔티움 상대로 승리)
+ 영지 없는 귀족의 대거 등장 (장자 상속제 풍습- 장남에게 땅 모두 물려줌)으로 기사의 수 늘어남
그러던 중,
우르바누스 2세의 연설: 예루살렘에서 튀르크족 쫓아내도록 도와달라고 호소
- 십자군의 등장
1차 십자군: 당시 무슬림 통치자 킬리지 아르슬란이었음. 간단하게 제압. (이때 십자군 은둔자 피터가 구두장이, 도살업자, 농민 등의 무리 등 지원자 불러모아 출발한 오합지졸이었음. )
2차 십자군: 이때부터 기사들의 출병이 있었음. 무슬림은 연합하지 못했고 십자군이 예루살렘 장악함. 당시 십자군은 지독하게 대학살벌임(에드워드 기번의 기록에 따르면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이틀동안 7만명 죽였다고 전함) 이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왕국으로 선언함. 이외에도 안티오크공국, 에데사 백작령, 트리폴리 백작령이 세워짐.
예루살렘 대학살이 있고 나서 연설가 몇명은 그 침략을 종교전쟁에 비유하며 무슬림 저항군을 일으키려고 함. 당시 몇세기 전부터 지하드라는 말은 쓰이지 않았음. 이슬람이 기존 세상에 대항한다는 초기 의식은, 이슬람이 곧 세상이라는 의식으로 바뀌었기 때문.
cf) 십자군이 왔을 때, 무슬림은 모두 아사신을 혐오하고 있었음. 이에 아사신과 십자군은 사실상 동맹관계였음.
이슬람의 반격:
1. 장기의 등장: 튀르크 장군 출신. 모술 통치, 알레포 차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인 레반트에 무슬림 국가 등장함. 1144년 에데사 점령
2. 누르딘: 장기의 아들. 무슬림 단결. 움마에 대한 소속감 부활시키며 지하드에 대한 열정 불러 일으킴.
3. 살라 알 딘 유수프 이븐 아유브(살라딘): 누르딘의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의 조카였음.
- 누르딘이 이집트 정복위해 살라딘의 삼촌 파견. 이때 장군이 조카 살라딘 데리고감.
장군이 이집트 점령했지만 직후 바로 죽는 바람에 살라딘이 이 지역을 맡게 됨.
누르딘이 세상 떠나면서 살라딘이 이집트 뿐 아니라 시리아의 왕이라고 선언함.
- 포위와 경제적 압력, 협상을 통해 십자군 점령지 대부분 되찾음.
- 1187년 예루살렘 되찾고자 그리스도교들에게 제안서 보냄. 떠나고자 한다면 재산을 챙겨서 떠날 수 있고 남고자 한다면 예루살렘에서 탄압받지 않고 그들의 종교를 믿을 수 있고 순례자들은 얼마든지 오갈 수 있다는 내용.
→ 그리스도교 이를 거부함.
→ 살라딘 도시 포위하여 무력으로 빼앗음
→ 이에 3차 십자군 조직됨:
독일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성지 가던 중 말에서 떨어져 강물에 빠져 죽음),
프랑스 필립 2세(성지에 도착해 아크레 항구 점령하는 전투에 가담하고는 지쳐서 고향 돌아감),
영국 리처드 1세
→ 리처드 1세와 살라딘 1년간 대립.
→ 1192년 6월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리처드 1세는 지친 상태. 살라딘은 신선한 과일과 얼음 보냄.
스스로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협정을 맺기로 함.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가질 것이나 그리스도교의 성소들을 보호하고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신앙 지킬 수 있도록 허락. 그리스도교의 순례자들의 순례 허용
(리처드1세는 고향으로 돌아가 승리를 자랑하였으나, 사실상 처음의 조건 보장 받은 것임)
이후 십자군은 200년간 계속 이어졌으나, 중요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음.
이슬람의 입장에서 본 십자군?
- 문명간의 충돌이다?
저자: 당시 무실림은 두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에 드리워진 참사라고 봄. 무슬림 세계에 깊숙하게 침투한적은 없었음. 메카, 메디나, 호라산, 박트리아 등 지역에서는 십자군의 영향 받지 않음.
- 십자군이 이슬람에 미친 영향?
저자: 십자군은 무슬림 세계에 서유럽에 대한 호기심 불러일으키지못함. 오히려 영향력은 반대로 흘러감. 서유럽과 중간 세계 간 교역이 증대하면서 동방의 물건, 향신료 등이 유럽에 전해짐. 이슬람 세계의 부가 유럽에 전해졌으며 인도나 인도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서유럽에 전파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킴.
동방의 공격
몽골의 성장:
중앙아시아의 스텝지대에서 살면서 양고기와 우유, 치즈 먹고 게르라는 천막집에서 살았음.
몽골족은 여러 세기동안 중국 세계를 침입하였는데, 중국은 이들 견제하기 위해 이들의 분열을 꾀함.
1165년(이슬람력 560년) 테무친(칭기스칸)의 등장
테무친의 아버지는 몽골의 족장이었으나 그가 아홉살 때 살해당함. 족장의 지지자들은 줄행랑쳤고 테무친 가족은 힘든 세월을 보냄. 테무친과 어머니, 동생들은 야생 열매 먹고 작은 사냥감 잡아먹으며 살아감. 아버지를 죽인 자들은 테무친을 쫓아다니며 그를 견제함. 이후 테무친은 '노카르(무장한 동지)' 끌여들여 이들의 도움으로 몽골족 통일함.
칭기스칸의 몽골족
1211년 금 공격
1218년 중간 세계 역사에 등장
1218년 호라즘 공격
당시 중간세계에는 호라즘있었음. 당시 호라즘의 왕 알라우딘 무함마드는 몽골족의 보호를 받는 상인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음. 이에 몽골의 군주가 배상금을 요구하자 호라즘의 왕은 그들 중 한명을 사형에 처하고 턱수염을 뽑아버린 후 돌려보냄(턱수염을 봅는 것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모욕이었음) 이에 1219년 전쟁 발발하였고 칭기스칸의 군대가 호라즘의 군대 박살남.
이후 몽골은 호라산과 페르시아로 행군해 대학살벌임.
(무슬림 역사가 세이피 헤라비: 니샤푸르에서 174만 7000명 죽었다고 기록/ 페르시아 역사가 주즈자니 헤라트에서 240만명 죽었다고 기록/ 분명 부풀려진 숫자이나 학살의 규모 짐작해볼 수 있음)
그 뿐 아니라 몽골족 페르시아 공격하면서 많은 것을 파괴함. 특히 고대 지하수로인 카나트 파괴함.
(농경사회에서는 카나트는 생명의 핏줄이나 다름없었음)
1227년 칭기스칸의 사망
이후 아들들이 제국 나누어가진 뒤 대학살벌임.
1256년 훌라구 아사신 전멸시킴.
(아사신 첩보원이 훌라구 죽이려고 하자 훌라구는 알라무트 급습했고 아사신 모조리 죽이고 근거지 파괴함)
이후 바그다드로 행군하여 아바스 왕조 공격
1258년 2월 3일 바그다드 공격 시작, 2월 20일 경 바그다드 거의 사라졌다고 할 정도로 파괴됨.
이후 훌라구는 남쪽으로 향하여 이집트 공격하였으나
당시 이집트에는 가장 센 맘루크 장군인 자히르 바이바스가 있었고 새로운 무기(총) 사용으로 훌라구를 상대로 승리함.
cf) 이 때 맘루크 왕조- 진짜 왕조는 아니었음. 왕좌가 세습되는 구조가 아님.
술탄이 죽으면 가장 센 맘루크들이 자신들의 내부에서 술탄을 새롭게 뽑음. 일종의 능력주의 사회였음. 맘루크 왕조의 통치 아래 이집트는 아랍 세계의 주도적인 국가로 부상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짐.
무슬림은 결국 몽골족 재정복함.
전쟁으로 영토를 되찾은 것이 아니라 개종으로 몽골족 이슬람에 끌어들임.
1257년 베르케 칸 : 몽골족 첫 개종
1295년 마흐무드 가잔: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 이후 그들의 후손은 일한왕조이어가며 페르시아 통치.
몽골귀족에게 지역에 대한 규제 완화할 것을 지시함. 이는 대학살 이후 이슬람과 문명이 다시 회복될 것을 보여주는 신호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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