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세상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요약 10편(부활) 본문

역사 책 리뷰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요약 10편(부활)

오늘내일모레 2022. 4. 27. 10:10
728x90
728x90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타밈 안사리 저

이 책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요약한 내용입니다.


부활(이슬람력 661년-1008년/ 서기 1263-1600년)


0. 몽골의 정복 이후 이슬람 

- 몽골 정복자들이 남긴 것

  1) 이슬람 신학에 위기를 촉발함.

  : 무슬림 "이슬람이 전재에서 승리한 이유는 무함마드의 계시의 진실성을 증명한 것" 

    그렇다면 몽골의 승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

시리아의 법학자 이븐 타이미야
1. 이슬람에는 잘못된 것이 없고 계시는 모두 진실하다. 그러나 무슬림에게 문제가 있다.
   무슬림이 '진정한' 이슬람을 실천하지 않아서 신이 그들을 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 무함마드, 그의 동료들이 닦은 규율로 돌아가야 한다.

2. 지하드도 모든 무슬림의 핵심적인 의무이다. 
   지하드는 목숨, 집, 재산을 방어할 뿐 아니라 알라라는 공동체를 확장하는 수단이기도 하므로 싸움도 불사한다.
   그는 지하드가 싸워야할 범위를 확장하여 비무슬림 뿐 아니라 이단자, 배교자, 분리파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주     장한다.   

  cf) 초기 무함마드 비롯한 무슬림들은 무슬림이 되고자하는 이들은 무슬림으로 받아들임. 
이븐 타이미야는 무슬림이 되는 방법은 오직 하나이며 그 방법을 확실하게 밝히고 따르는 것이 무슬림의 임무(해석 끼어들 여지 없음)

이러한 타이미야의 교리는 변형되어 이후 인도와 북아프리카 살라피즘 운동으로 재현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짐. 

   2) 수피즘이 꽃을 피움

  - 이슬람 특유의 신비주의 

  - 수피즘의 목표지점은 같았으나 방법은 저마다 달랐기 때문에

  유명한 수피 주변에는 구도자들이 몰려들어 공동체 형성(수피형제단) 

   →스승이 제자에게 신비주의 방법론 전수하는 수피 교단으로 진화       

 - 일부 수피 형제단은 신비주의 기사단으로 진화하였으며 푸투와(유럽의 기사도와 유사한 기풍)의 기반이 됨. 

- 수피 특히 소아시아 지역에서 빠르게 증식됨. 

 

 

1. 오스만제국(이슬람력 700-1341/서기 1299-1922)

 

- 소아시아: 튀르크계 무슬림과 유럽의 그리스도교의 경계지대 위치. 소아시아 동부 지역은 여러 튀르크 왕자들이 통제, 서부는 비잔티움이 통제한 상태지만 누구의 소유도 아닌 무법지대로 존재하고 있었음

→ 중앙아시아에서 튀르크 유목민들이 소아시아로 쏟아져 옴. 이에 일반 대중들은 수피교단에 의지하게 됨. 

→ 수피즘의 증식: 수피 교단의 번식, 수피교도의 기사들 접경지대로 진격함. 

 교단의 우두머리가 영토를 확보하면 스스로 에미르(사령관/왕자)라 칭하고 그의 나라 에미리트(번역:토후국)로 선언함.  

→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에는 수많은 에미리트 생겨남.  

 비잔티움과 접경지대가 서쪽으로 이동할 수록 기사들은 접경지대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과 가까워진 지역까지 가서야 이동을 멈추었고 이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이 탄생함

  

- 오스만제국:

1) 오스만

1258년 탄생.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에미리트 세웠고 주변 지역 정복해나감. 

 

2) 무라트 1세: 흑해 건너 유럽지역 조금씩 정복. 수도 왕궁 정부관료제도 등 체제 정비함.

3) 바야지드 1세:

  - 데브시르메 제도 마련

데브시르메 제도: 유럽의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생포한 소년들을 궁으로 데려와 무슬림으로 기르며 정예 병사로 훈련시키는 제도임.(맘루크 제도와 비슷) 데브시르메로 길러낸 병사를 예니체리(새로운 병력)이라 부름.   
→ 바야지드 1세는 예니체리 덕분에 그 왕조의 봉건 영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음. 

  -유럽으로 점차 세력 확대, 니코폴리스에서 프랑스-헝가리 연합군에 승리(1396년)

  - 스스로 술탄 칭호 붙임 세속 칼리프로 선포한 것

  - 티무르와의 전쟁: 바야지드의 봉건영주들이 통치권을 빼앗기자 티무르에 도움을 청한 것 

    1402년 앙카라전투 티무르에게 패함

티무르제국:
티무르 이랑(페르시아어: 절름발이 티무르)에 의해 건국. 14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에서 부상. 몽골제국 못지 않게 잔혹한 대학살 벌임. 티무르가 죽은 후 빠르게 분열됨.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미래엔)

4) 술탄 메흐메트 

- 콘스탄티노플 공격: 이미 그 주변 지역 돌아 동유럽 진출하였으나 콘스탄티노플은 상징적인 의미였음.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위해 거대한 대포(일명 바실릭) 만들어짐.

 콘스탄티노플 54일간 지속됨. 콘스탄티노플은 보스푸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바다로 둘러쌓여있었으며 내륙방향에는 거대한 석벽이 줄지어있어 난공불락이었음.

→ 끈질긴 공격, 부실한 문단속(;)으로 승리를 거둠

메흐메트는 이 곳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였고 이 도시는 이스탄불로 불림.

저자: "무슬림이 한창 전성기 때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했다면? 유럽전체가 이슬람 제국에 흡수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오스만이 차지한 이 시기에는 이미 유럽이 상승하고 있는 상태였음. 

- 이스탄불에서 세금 감면, 종교의 자유 허용(단, 인두세 지즈야 납부) → 다양한 이들이 이스탄불로 유입됨. 

 

5) 슐레이만 대제: 유럽, 아시아에 걸치고 콘스탄티노플, 메카, 카이로 손에 넣음.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 (셀림1세 부터) 오스만 통치자가 스스로 칼리프라고 부르기 시작함. 이슬람 역사상 처음으로 칼리프인 동시에 술탄이었음. 

 

6) 오스만제국의 사회체제:

- 복잡한 사회 구조: 복잡하지만 서로 맞물려 균형을 이룬 형태였음

- 지배계층, 피지배계층/ 지배, 피지배계층이지만 동일한 수피 셰이크를 숭배하여 한 무리에 속하기도 함.

- 밀레트 구성: 오스만 사회 전체는 주요 종교 공동체로 구획됨. 각 공동체는 자치적인 국가 밀레트 구성하여 각자 종교의식, 교육, 재판, 자선, 사회 복지를 책임짐.

- 무슬림 공동체 역시 수많은 밀레트 중 하나. 최고 지도자는 셰이크 알 이슬람임. 이슬람법 샤리아에 의거하여 법률 제정하고 법 해석하여 적용하는 재판관이자 종교 교육, 종교의식 집행 등의 역할을 함.

- 수상(궁정관료체계의 우두머리)과 셰이크 알 이슬람은 서로 균형과 견제 

 

- 데브시르메 제도: 원래는 정복지에서 그리스도교 소년들을 데려오는 것이었으나 메흐메트 때 데브시르메 제도를 오스만 제국 내부로 확장함. 이는 오스만 상류층이 되는 통로이기도 했음. 하지만 결혼하거나 자녀 남길 수 없어 지위가 세습되지는 않음. → 예니체리 통해 기존 튀르크 귀족 견제, 또 튀르크 귀족 남겨두어 예니체리 견제.

 

- 튀르크 귀족: 토지 소유자(티마르)이자 주된 납세자였음. 정복전쟁 치른 후 술탄은 최고 장수들에게 티마르 하사함. 새로운 정복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던 티마르 빼앗아서 하사함. 귀족 계급이 세습되지 않는다는 의미. 

 

- 상인 조합 아크히: 새로운 사업체 허가, 회비 걷고 융자해주고 연금, 장례비용,의료 서비스 제공, 회원 대변하여 국가에 청원하기도 함/ 수피 교단과 연계: 많은 조합원들이 조합계열에 영향 미치는 수피형제단에도 소속됨. 

 

 

 

 

2. 사파비왕조(이슬람력 906-1138년/ 서기 1501-1736)

교학사 교과서 이미지

1) 사파비 왕조의 시작: 영적 지도자 셰이크 사피 알 딘 중심으로 연합한 수피교단에서 시작됨. 

입회자 중 일부 선발하여 정예부대로 키움. 이들은 천으로 열두겹 두른 붉은 터번을 썼는데 이를 키질바시라 부름. 

cf) 열두겹으로 두른 모양: 시아파의 열 두 이맘 상징 
시아파 열 두번째 이맘이 어린 소년일 때 사라짐. 주류 시아파(열두 이맘파)는 그를 '숨은 이맘'이라 부르며 그가 아직 살아있으며 여전히 신과 직접 소통하고 있다고 믿음. 역사의 끝에서 열 두 이맘이 나타나 정의의 시대를 열 것이라고 생각함. 그를 '구세주' 마흐디라 부르며 이란 대부분이 시아파 중 이 분파를 신봉함. 

- 정치 조직화된 사파비 교단은 당시 사회 혼란과 맞물려 움직임. 당시 페르시아 세계는 다양한 튀르크 수장이 다스리는 작은 공국으로 조각난 상태였음. 당시 지방 군주들은 사파비가 반국가적 운동과 연계될 것을 두려워했고 사파비 수장과 그 일가를 죽임. (둘째 아들 이스마일만 생존)

- 이후 사파비 교단은 비밀단체로 수련하면서 이스마일을 수장으로 섬김.

 

2) 이스마일: 

- 이스마일이 12살 때 은신처를 나와 아버지를 죽인 군주에게 복수 단행

- 15살에 '샤한샤(왕들의 왕/ 페르시아 고대 왕조에서 사용하던 용어)'이라고 칭하며 페르시아계 정체성을 지지함. 

- '열두 이맘파' 시아파 국교 선포. 이에 많은 시아파들이 사파비 제국으로 모여들게 됨. 

- 찰다란 전투: 오스만과 사파비의 충돌/ 오스만 셀림1세의 승리, 사파비제국의 수도 타브리즈 획득. 겨울이 온 후 오스만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였으며 사파비군대는 타브리즈 되찾음. 사실상 오스만과 사파비의 경계가 됨. 오늘날까지 유지.

 

3) 샤 아바스 대제: 전성기

군대에 총과 포 갖춤. 서유럽과 아프리카, 인도까지 상품 수출. 이스파한 건설 

 

4) 사파비 왕조의 예술:

- 회화기법: 페르시아 세밀화 최고조에 이름

- 서예 발달: 쿠란을 기록한 글을 숭배하는 전통때문에 주된 예술 분야로 여김. 이시대에 완벽하게 다듬어진 모습.

- 피르다우시의 서사시 <<샤나메>> 채색서: 회화기법과 서예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예술 생산품

 

- 건축 발달 : 묵직한 고분같은 돔 지붕, 미나레트가 감싼 형태 

뉴시스 기사 사진 https://www.news1.kr/articles/?2688951/ 이맘 모스크

5) 수도  이스파한: 1598년 샤 아바스는 이스파한 새로운 수도로 삼고 도시 건설계획에 착수함. 

방문객들에 의해 '이스파한니스피 자한(이스파한, 세상의 절반: 당신이 이스파한을 보지 못한다면 세상에 태어나 봐야할 것 중 절반을 놓친 셈이라는 뜻)'이라는 말이 만들어짐.  

 

 

 

3. 무굴제국(이슬람력 900년경-1273년/ 서기 1526-1857년)

 

1) 바부르:

- 무굴 제국 건설

- 스스로 티무르 이랑과 칭기스칸의 후손이라 주장 

- 사마르칸트 두번 잃은 후 떠돌다가 카불 발견, 1504년 카불의 왕으로 즉위함. 

- 1만명을 데리고 인도로 향했고 10만 부대, 1000마리의 코끼리 지닌 델리의 술탄과 전쟁에서 승리함(10대 1의 전설/ 총알과 대포의 위력)

 

2) 아크바르 대제(저자: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여왕에 필적):

- 할아버지 바부르가 정복한 영토 되찾고 확장. 

- 무굴제국의 취약점 파악(소수의 무슬림이 다수의 힌두교도 다스리는 구조)

힌두교도들에게 관용 정책 펼침: 정부 관직 등용 기회 허용, 지즈야 폐지(모든 시민에게 동등하게 토지세 부과), 병력파견하여 모든 종교의 사원과 성지 보호 

- 다양한 종교에 관심 많아 각 종교의 좋은 점 혼합하여 새로운 종교 '디니 일라히(신의 종교)' 만들었음. 힘 얻지못함

cf)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좋은 점 혼합하려는 시도는 부르 시대 이래로 있었음. 
두 종교의 교차점에는 신비주의 있었음.
→ 1499년 나나크: 힌두교의 구루와 수피즘의 성인 반영하여 영적인 기법 직접 전수함 : 시크교의 탄생 

3) 아우랑제브

- 샤자한의 아들, 위대한 무굴제국의 마지막 황제

- 아버지에 맞서 권력 찬탈. 석탑에 갇힌 늙은 황제는 감옥에서 남은 여생을 보냄. 침대에서 거울을 통해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타지마할 뿐이었음. 

- 정통파 이슬람을 특권을 누리는 지위에 되돌려놓는 일에 집착: 지즈야 부활, 힌두교도에게 특별세 다시 부과, 힌두교 사원 파괴, 정부 관직에서 힌두교 축축, 남쪽의 반독립적 힌두교 권력자인 라즈푸트족과 전쟁 벌임 

- 시크교도 몰살하고자 함. 시크교도 전사조직으로 변모

- 그는 광신도였으나 이 시기 무굴제국은 가장 크고 강력한 제국 셋 중 하나였음.  

 

4) 무굴제국의 예술

- 서정시: 문맹 시인 카비르, 궁정 시인들 페르시아 시문학 다듬었음.

- '페르시아풍' 세밀화 발전

- 건축: 오스만 양식과 사파비 양식의 결합/ 샤 자한의 타지마할: 세상을 더난 왕비를 위한 영묘 건설, 샤자한은 전체 과정부터 세부 사항까지 감독함  

 

5) 이 시기에 여행자가 이 세 무슬림제국과 주변 지역을 여행한다면?
대체로 튀르크족이 정치와 군사 권력을 잡고 있었을 것
지식인 계급이 대개는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어 고전문학을 안다는 것을 발견
어딜가든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아랍어로 낭송되는 모습을 들었을 것
학자계층인 울라마가 잇고 이들이 대중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
수피즘과 수피교단도 만날 수 있었을 것
공공장소에서 여성은 몇명 볼 수 없었을 것. 남성이 공공영역을 독점하고 있었음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를 본다면 그녀는 아주 낮은 계급이었을 것이고 여성은 팔과 다리 가슴 선이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고 머리가리개를 쓰고 있었을 것
남자들은 머리를 가리고 있으며 옷이 헐렁하고 기도를 위해 바지가랑이가 보이지 않는 의복을 입었을 것 
모든 도시는 마을을 모아놓은 형태였을 것이고 동네마다 시장이 있고 도시마다 화려한 모스크가 있었을 것
모든 모스크에는 돔과 미나레트가 있고 유약을 바른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된 것을 흔하게 목격할 것 
이 세계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면 몇가지 신화적인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 우마르, 알리, 우스만에 대해 잘알고 있었을 것
이 시기 이 세계 대중들은 무슬림제국을 '세계'라 짐작했을 것. 

 

시카고 역사학자 마셜 호지슨

"16세기 화성에서 온 방문객은 인간 세계 전체가 무슬림이 되기 일보 직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728x90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