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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세상
서울대학교 노경덕 교수님의 연수를 듣고 개인적으로 내용을 정리하고 싶어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당시 연수의 주제는 '스탈린그라드와 소련의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서구 유럽이나 미국 입장이 아닌 '소련의 입장에서 살펴본 세계대전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연수를 듣고 이해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므로 교수님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1. 전쟁의 기원 -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발생 : 볼셰비키 - 마르크스 주의를 신봉하는 이론가들이었음 - 유물론을 믿음 이때 유물론이란, 세상이 경제체제를 중심으로 진보한다고 믿는 사상인데 그 진보는 단계적으로 발생함. 원시 공산사회-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 사회주의 사회로 전개됨. - 볼셰비키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나라는 봉건제..
'신라의 건국과 초기 불교'라는 주제로 경주 답사를 다녀온 후 공부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1. 7처 가람설: 흥법 제3 아도기라조에 의하면,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아도는 고구려인인 그 어머니로부터 신라의 서울에는 전불시대의 일곱개의 가람터가 있으며, 앞으로 3000년개월이 지나면 성왕이 나와 크게 불교를 일으키게 될 것이니 그곳에 가서 불교를 전파하라는 당부를 받는다. 이 일곱개의 가람터를 전불시대의 가람이라고 한 점에 비추어 이 절터는 과거 칠불인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등의 절터를 뜻하기도 한다. 7-8세기에 신봉되었던 이 칠처 가람설에 의거하여 신라인은 그들이 염원하던 불국토가 신라임을 확신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이 열렬해지고 ..
1910년 3월 26일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되다.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은 을사조약을 주도하며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다.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하며 보호국이 되었고 관리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신중론자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에 이토 히로부미는 회의적이었고 본국의 부담을 고려하여 자치론의 입장에서 조선 병합을 고려한 인물이다. 평소 강제 병합에 반대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09년 강제병합에 대해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이 상의해오자 이토는 아무런 이의없이 동의한다. 암살조는 세 군데 기차역에 배치되었다. 안중근은 두 번째 조였다. 첫 번째 조가 도착하기 전..
1603년 3월 24일(게이초 8년 2월 1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수립하다. 일본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영웅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성격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울지 않는 새를 어찌하겠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오다 노부나가- 울지않는다면 죽여버리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어떻게든 울게 만들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1467년부터 1615년까지 이르는 혼란기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을 받아들여 주도권을 잡았고, 통일을 눈 앞에 두었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오다 노부나가를 주군으로 모시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회를 잡게되고 전국을 평정한다. 그리고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비켜달라는 명목..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이 대한제국 외교고문이었던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저격하다. 1905년 을사조약은 조선의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사람들은 분개했다. 어떤 이들은 의병의 형태로, 어떤 이들은 자결의 형태로, 또 누군가는 암살 등의 방법으로 제각기 저항한다. 당시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었던 스티븐스는 친일파 미국인으로 을사조약을 찬양했다. 1908년 3월 스티븐스는 미국으로 가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발언을 한다. 이에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의사는 외교 고문 활동을 마치고 잠시 귀국한 스티븐스를 암살하기 위해 각각 권총과 쇠몽둥이를 준비했다. 당시 장인환은 철도와 어부 일을 하던 노동자였으며 전명운은 철도 관련일을 ..
1933년 3월 21일 나치 독일이 다하우에 첫 강제 수용소를 건설하다 다하우는 독일 바이에른 주에 위치한 도시로 뮌헨에서 16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다. 독일 나치 독일이 유럽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며 강제 수용소가 늘어난다. 이곳 다하우는 1933년 3월 21일 첫 강제수용소가 지어진 곳이다. 나치 간부였던 하인리히 힘러는 이 곳 수용소에 대해 "정치범 수용을 위한 최초의 강제 수용소"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강제 수용소를 세운 이튿날부터 좌파 활동가들을 잡아갔다. 다하우에는 총 30개국 이상 20만명의 죄수가 수감되었다. 그 중 1/3은 유대인이었다. 본래 유럽에는 유대인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적 태도와 감정이 있었다. 19세기 기존 종교적 반유대주의가 과학적, 인종적 반유대주의로 바뀌게되면서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