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역사4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하] 궁궐의 역사4(경복궁의 구조, 역사) 1. 경복궁(광화문-근정전까지)광화문:- 일제는 1915년 경복궁에서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었음.(일종의 박람회로 ‘진보’된 문물 보여줌으로써 식민통치에 대한 자신감 표현)공진회 끝나자 바로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설이때 광화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 축과 방향이 일직선으로 되어있던 것을 틀어버림청사를 그 선상에 놓긴 하였으나 축을 태평로에 맞추면서 경복궁의 축과 3.5도 틀어짐. 경복궁을 정면에서 가로막으면서 동시에 그 축을 비트려는 의도-이후 광화문은 해체되었고 경복궁 궁성 동북쪽(지금 국립민속박물관 자리)로 옮겨짐. 이후 한국전쟁 때 형체마저 잃음. 이후 68년 복원하였으나 철근콘크리트도 지어졌고 조선총독부 청사에 맞추다보니 경복궁 축과 틀어져 복원됨. 그리고 2006년 콘크리트 .. 2025. 6. 5.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 궁궐의 역사 3(고종- 경술국치) -고종:신정왕후가 경복궁 중건 명하고 책임자를 흥선대원군에게 맡김영건도감이 설치되면서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는 기반이 되었을 것(임금의 생부였어도 공식적인 직함이 있거나 섭정이 된 것도 아닌 상태에서 영건도감을 통해 측근을 기용하면서 실권 키움) 고종의 친정(1873) 이후 경복궁의 화재 이에 창덕궁으로 이어, 이후 다시 경복궁으로 환어재위 기간동안 10여 차례 이어함이는 정변, 농민전쟁, 청일 간의 각축 등이 원인이 되었을 것 1894년 농민전쟁, 청일전쟁 등 정세가 급변하자 창덕궁으로 이어함두달 뒤 다시 경복궁으로 환어함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벌이려는 상황에서 일본의 압박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아관파천)변복하고 궁녀의 가마타고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을 빠져나가 러.. 2025. 6. 1.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 궁궐의 역사 2(광해군-영조까지) 2. 두번째 양궐체제 - 광해군: 정릉동행궁에서 즉위선조 때 시작된 종묘, 창덕궁 완공창경궁 영건 공사 시작함 창덕궁으로 이어하여 창덕궁이 법궁이 됨이듬해 새 궁궐 영건 추진(인경궁) 또 그 직후 새 궁궐 짓자는 논의 등장(김일룡이라는 술사가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있으니 그곳에 궁궐짓자는 주장을 함)광해군이 이를 부득이 추진하여 이는 경덕궁(후일의 경희궁)이 됨 쫓겨나는 시점까지 궁궐을 짓는데 집착한 것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관련있었을 것형인 임해군이 있음에도 전시 상황에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정비인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정통성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자신의 왕권의 정통성을 보완하면서도 붕당 간 대립이 치열한 상황에서 궁궐 영건을 통해 정국 운영에 개입하고자 함하지만 불필요한 궁궐영건을 무.. 2025. 5. 31.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 궁궐의 역사1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역사) 1. 첫번째 양궐체제- 임어: 임금이 어느 궁궐에 들어가 사는 것- 이어: 기거하는 궁궐을 옮겨가는 것- 환어: 원래의 궁궐로 돌아오는 것 - 법궁: 임금이 임어하는 공식 궁궐들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왕실의 생활 공간 뿐 아니라 공식 활동을 하는 제반 공간 갖춤 - 이궁: 임금이 이어할 목적으로 지은 또 다른 궁궐법궁보다는 한 단계 낮지만 임금의 공식활동 공간에 필요한 구성요소를 모두 갖춤 - 조선의 임금들은 법궁과 이궁 두 궁궐을 유지하면서 오가며 지냄. 법궁- 이궁 양궐체제라 부를 수 있음 태조:경복궁 창건한양천도 결정되고 종묘, 사직, 궁궐 터 정하여 착공완공 후 궁성 쌓고 건춘문, 영추문, 광화문 세움 광화문 앞길 좌우에 의정부, 삼군부 등 관청 건물 세움 새 궁궐에서 잔치 베풀며 정도전에.. 2025. 5. 30.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