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신정왕후가 경복궁 중건 명하고 책임자를 흥선대원군에게 맡김
영건도감이 설치되면서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는 기반이 되었을 것
(임금의 생부였어도 공식적인 직함이 있거나 섭정이 된 것도 아닌 상태에서 영건도감을 통해 측근을 기용하면서 실권 키움)
고종의 친정(1873) 이후 경복궁의 화재
이에 창덕궁으로 이어, 이후 다시 경복궁으로 환어
재위 기간동안 10여 차례 이어함
이는 정변, 농민전쟁, 청일 간의 각축 등이 원인이 되었을 것
1894년 농민전쟁, 청일전쟁 등 정세가 급변하자 창덕궁으로 이어함
두달 뒤 다시 경복궁으로 환어함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벌이려는 상황에서 일본의 압박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아관파천)
변복하고 궁녀의 가마타고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감
만 1년 머무르다가 환궁 결정함
경복궁이나 창덕궁은 안심할만한 곳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공관이 밀집한 정동 일대에 새 궁궐 마련하는 편을 택함
정동 일대에는 정릉동행궁(경운궁 터)가 자리잡음
경운궁 준공하여 1897년 환궁함
경운궁이 임금이 임어하는 유일한 궁궐이 되어 단궐체제로 바뀜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고종 연호 광무로 고치고 대한제국 선포함.
1904년 경운궁 화재 발생
1905년 고종은 수옥헌(현재 중명전)에서 일본으로부터 을사늑약 조인 강요받음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조약 체결
고종은 조약의 권한 위임한 적도 없고 박제순이 도장을 찍은 것도 일본인이 도장을 탈취하여 강제로 찍음
이후 고종이 조약을 비준한 사실도 없음
1906년 헤이그 특사 파견
이준, 이상설, 이위종 특사로 임명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 알리고자 함
이후 일본은 고종을 황제위에서 끌어내리고자 압력가함
고종이 양위 거부하였지만 이토와 이완용이 집요하게 압력을 가하였고 이에 고종을 황태자에게 대리청정 명함
이후 1907년 결국 황태자에게 전위함
태상황이 된 고종이 머물 궁호를 덕수로 정함
이에 경운궁이 고종의 거처 덕수궁이 됨
- 순종:
창덕궁으로 이어함
하지만 통감부가 국권의 많은 부분을 잠식한 상태였으므로 순종의 거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지 못함
창덕궁 흥복헌에서 이완용이 순종에게 전권 위임장을 받음
(전각의 격이 낮고 공식적인 모임 장소로 쓰이지 않던 곳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번듯하고 떳떳한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
1910년 8월 29일 이완용과 조중응 통감 관저로 가서 조약 체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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